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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 같은 반헌법 내란인데 전두환이 성공하고 윤석열이 실패한 차이는?
    사회 2025. 12. 12. 13:43

     

     

    [서드앵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고 오늘로 46년이 지났다. 전두환 신군부는 12.12 내란 성공 후 군권을 장악했고, 이듬해 5.18 광주학살을 자행하며 8년 독재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45년 뒤인 2025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 역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실패 확률이 극히 낮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했다. 국회의 즉각적인 계엄 해체가 이뤄지고 계엄 선포 후 123일 만에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이 내려졌다. 비슷한 형태의 헌정 침탈이 어떻게 한 번은 성공하고 한 번은 참담하게 실패했을까?

    10.26 사태 직후 보안사령관이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으며 군의 실세로 부상했던 전두환

    박정희 사후 권력 찬탈에 성공한 전두환과 하나회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피격 사살했고, 직후 대한민국 정치 지형은 급격히 재편됐다. 유신헌법 체제 속에서 박정희의 절대적 영향력이 사라지자, 군부 내에서는 권력의 공백을 둘러싼 암묵적인 경쟁이 시작됐다. 이 와중에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10.26 사건 수사의 전권을 맡게 되며 정치적 실세로 급부상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군내 불안정성을 인식하고 하나회로 대표되는 전두환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인사 개편을 추진했다. 이는 전두환과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에게는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였다. 전두환이 전출되면 하나회 조직은 박정희 사후 권력 투쟁에서 주변화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 인식이 12.12 사건의 근본적 배경이 됐다.

     

    조직 해체 위기 속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은 1979년 12월 12일 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했다. 그가 10.26 사건 수사와 관련됐다는 명분이었다. 당연히 강제 연행의 법적 절차를 무시했다.

     

    이 과정에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이 정승화 총장 구출을 위해 병력을 출동 시켰는데 ‘신사협정’이라는 전두환 측 계략에 말려들며 쿠데타 세력 진압에 실패했다. 제1공수여단, 제9사단 등을 서울로 진입시키고, 육군본부와 국방부 등 주요 군사령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그날 새벽 5시 10분, 최규하 대통령에게서 정승화 연행 사후 승인까지 받아냈다.

    12.12 쿠데타 성공 후 기념 사진을 촬영한 전두환과 군내 사조직 하나회 일당

    쿠데타 성공 후 전두환 신군부는 신속하게 제도적 통제 체계를 구축했다. 군의 핵심 요직에는 하나회 인사들을 배치했고 12.12 당시 육군참모차장을 맡아 사실상 이를 묵인한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최규하 정권은 쿠데타 5개월 뒤 내려진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함께 완벽하게 무너졌고 이후 8년간의 제5공화국 군부 독재가 시작됐다.

     

    정치적 위기 내몰린 윤석열, 비상계엄 카드로 반격 나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는 1979년 전두환 쿠데타와 닮은 듯 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윤석열은 신승(辛勝)을 거둔 2022년 대통령 선거 직후부터 여러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야당이 국회 내 압도적 다수당인 상황에서 꾸준히 하락한 국정운영 지지율은 계엄 선포 직전10%대 중반까지 떨어졌다. 이 시기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하야 및 탄핵 의견이 과반을 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야당 주도 주요 정부 인사 및 검사들에 대한 탄핵안이 연이어 발의됐고, 정부 예산안은 대폭 삭감됐다. 무엇보다 명태균 게이트를 비롯해 아내 김건희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2024년 12월 3일 밤 반국가 종북 세력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반헌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

    이 같이 복합적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윤석열은 “종북 반국가 세력의 체제전복 위협”을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정치적 위기 탈출용 반격 카드로 야당의 입법 활동을 반국가적 행위로 지정하고 ‘국회 권능 행사 방해’ 목적의 계엄을 단행한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의 계엄 시도는 전두환 쿠데타와 다른 결말을 맞았다. 군과 경찰의 방해에도 불구 계엄령 선포 2시간 38분 만에 국회의원 190명이 국회로 집결해 출석의원 전원 만장일치로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군의 대응도 1979년과 달랐다. 12.3 계엄 당시 국회에 출동한 군 인사 중 일부는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 의지를 드러냈다. 국회의원 진압 지시를 받은 군인 상당 수 역시 이를 적극 수행하기 보다는 제한된 진압만 시행했다.

     

    더욱 결정적인 장면은 특전사 헬기의 국회 투입 지연이었다. 헬기는 비행에 부적합한 기상과 수방사의 허가 지연으로 인해 국회 상공에 도착하는 데 예상보다 1시간 이상의 지연을 겪었다. 의도적인 방해인지 상황적 우발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국회의원들이 계엄 해제 결의를 통과시킬 ‘골든타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윤석열 비상계엄령 선포 후 2시간 30여분 만에 해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 시킨 국회의원들

    한 번 성공하고 한 번 실패한 내란, 가장 큰 차이는 시대정신

    12.12와 12.3의 성공유무에 있어 가장 근본적 차이에 대해 상당수 사회학자들은 민주적 제도의 견제 능력을 꼽고 있다. 1979년 최규하 정권은 유신헌법 체제 속에서 제한적 권한만을 가지고 있었고, 국회 또한 기능이 제한적이었다. 신군부의 기습적 거사 앞에서 제도적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이와 달리 2024년 국회는 헌법상 명시된 계엄 해제 권한을 즉각 행사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야당 의원들은 신속하게 의사당에 모였고, 계엄군의 진입 시도 와중에도 의결 절차를 강행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가 헌법적 기구들의 역할 분담과 견제라는 원리를 제대로 작동시켰음을 보여준다.

    12.3 당시 국회 본회의장 진입을 시도한 계엄군

    시민 저항의 질적 변화도 계엄을 막아낸 결정적 차이로 거론된다. 1979년 당시 대다수 시민들은 사건이 일어난 사실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언론 통제로 인해 12.12 사건의 진행 과정이 대국민에게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이 체계적으로 탄압되던 시대였다.

    2024년은 완전히 달랐다. 계엄 선포 직후 SNS와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가 퍼져 나갔다. 국회 앞으로는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실패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친위 쿠데타를 몸으로 막아냈다.

     

    국제적 환경도 달라졌다. 1979년 당시 미국과 국제사회는 냉정 대치 속 한반도의 정치적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이를 위한 독재도 어느 정도 용인하거나 묵인했다. 2024년 국제사회 어젠다는 민주주의 인권 수호고 이에 윤석열 계엄에 대해서도 국제사회 비판이 쏟아졌다. 이러한 국제적 압력은 계엄 실패의 간전적 배경으로 거론된다.

     

    언론의 역할도 변화했다. 1979년 당시 한국 언론은 정권의 통제 아래 신군부 정책만 반복해 소개하는 앵무새 같은 존재했다. 오히려 언론이 쿠데타의 합리화 서사 형성에 활용됐다.

     

    2024년 언론 환경은 그와 달랐다. 계엄령 선포 직후 보수언론이건 진보언론이건 구분없이 이에 대해 비판했다. 무엇보다 여론 형성의 새로운 창구로 떠오른 유튜브 언론이 계엄을 적극 비판 보도했고 판면 결정까지 여론의 단일대호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헌법재판소장 대리를 맡아 만장일치로 윤석열 탄핵안 가결을 이끌어낸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헌재의 윤석열 파면 결정이 내려진 것 역시 시대 변화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전두환 쿠데타 당시 사법부는 명백한 헌법 위반에 대해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유신헌법이라는 독재적 헌법 체재 아래 이를 견제할 사법부의 독립성 자체가 없었다.

    2024년에는 헌재가 대통령 파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며 한국 민주주의가 반헌법적 군사행동을 법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국가로 발전했음을 보여줬다. 1979년의 상처가 45년의 시간을 통해 치유된 것이다.

     

    12.12가 성공하고 12.3이 실패한 궁극적 차이는 우리 국민의 민주적 자각, 제도의 완성도, 그리고 시대정신의 변화다. 1979년에는 군부의 기습적 거사가 먹혀들었고, 이를 막을 제도적·사회적 힘이 부족했다. 이후 45년 간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한국은 헌법 제도의 견제와 균형, 시민의 자발적 저항, 언론의 독립성을 갖춘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진화했다.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계엄군과 맞서고, 의원들이 헌법을 들고 본회의 의사당에 모였던 그 순간이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자 우리 민주주의가 성장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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